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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부터의 도피 / 에리히 프롬 / 휴머니스트

bonbontorrent 2014. 4. 20. 01:40


< 사진 출처 : 휴머니스트 http://bit.ly/1hY58jh >



자유는 기회이면서도 불안 그 자체다. 자유는 고독과 불안을 수반하기에 일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버겁다. 그럴 때마다 소속감과 권위에 기대는 것 말고는 연약한 개인의 존재를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수단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권위에 복종하고 체제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개인의 자아실현과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 더 나아가 사회전반에 자리한 부조리 또한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은 지난 세기 독재정권을 경험했다. 눈부신 경제 성장의 이면에는 인권 탄압과 노동 착취란 어둠이 있었다. 지금은 당연한 권리인 자유와 민주주의는 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2006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거치면서 장기화된 경기침체는 정치적 자유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경제 위기 앞에서 평범한 이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에게 경제적 안정은 존립을 위한 최우선순위가 됐다. 경제 위기에서 구원받고 싶은 이들의 열망은 경제대통령을 표방한 이명박 후보,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과 경제민주화 구호를 선점한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보수의 집권이 독재정치의 동의어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 정부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는 단언컨대 과거로의 회귀였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파문, 땡전뉴스를 방불케 하는 공영방송사의 뉴스보도 등은 대표적 사례다. 정치적 자유가 축소되는 상황에서 대다수는 저항하지 않고 침묵했다. 어떤 이들은 독재자들을 신격화하기도 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통치자에 대한 열망과 번성했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보수정권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현상은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일본의 아베정권, 정부 비판 세력에 대한 정치탄압을 자행하는 러시아의 푸틴정권도 마찬가지다

아베 총리가 일본의 장기화된 경기침체를 해결한 구원투수로 비춰지는 상황에서, 푸틴만이 강한 러시아를 다시 세울 최고의 지도자라는 여론이 우세한 상황에서 이들의 권위주의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다. 프롬은 권력욕이 강함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에 뿌리박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한국, 일본, 러시아 이 3개국이 경제 위기를 겪지 않았더라면 권위주의적인 보수정권이 국민의 지지와 열광,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누군가가 삶의 구원과 안녕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개인은 자신의 자유를 순순히 내어준다. 그러나 권위주의자는 결코 국민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권위주의자는 애초에 혁명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와 기득권을 국민과 골고루 나눠 갖으려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들이 부를 독점한 경제권력에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옛 중산층의 구세주를 자처하면서 금융자본의 지배를 타파하겠단 히틀러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듯,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은 취임 1년이 지나자 경제활성화로 바뀌었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대두하던 1941,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출간했다. 자유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 복종에 대한 동경, 권력에 대한 욕망에 관한 프롬의 통찰이 70 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국의 독재정권은 반공척결의 수사를 전 국민에게 주입시켰다. 정부비판세력에 대해서는 불온세력이란 미명 하에 조작된 공안사건의 희생양을 만들었다. 그런 시절을 평범하게 살았던 분들에게 묻고 싶다. 권위에 복종한 채 살아야 했던, 자유라곤 주어지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이 진정 행복했는지. 그리고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길 진정 원하는지.  



+ 여러 번 읽어 내것으로 소화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