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10. 22:06 2016년/봄날의 제주
[4/27]비 오는 날 험난했던 올레21코스, 하도-종달 올레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정말로 험난했던 4월 27일 수요일, 올레 21코스, 하도-종달 올레를 걸었다. 사실 올레를 걸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원래는 버스를 타고 석다원에서 점심을 먹고 그 이후는 어디 카페에 들어가 농땡이나 칠 요량이었다. 비도 오겠다, 놀멍쉬멍 쉬엄쉬엄 다니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사서 고생한 하루가 되었다.
일단 이왁게스트하우스에서 아침 10시에 체크아웃하고 나왔다. 월정리 해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비바람이 강하지 않았다. 우산 쓰고 우비 입고 적당히 걸어다닐만한 날씨였다.
월정리 해안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는 길, 파도가 넘실대는 걸 보며 오늘처럼 강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엔 풍력발전기는 참 많은 전기를 생산하겠다 싶었다.
에메랄드빛 혹은 사파이어빛으로 빛나는 월정리 바다를 보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비 오는 날의 바다도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다음에는 부디 파란 바다를 볼 수 있길 기약하며.
비바람이 강하게 몰아치는 그날, 월정리 바다에 몸을 던지는 서퍼들이 보였다. 파도가 무섭지 않은지, 서핑을 즐기는 그들의 열정에 감탄스러웠다.
월정리 해변가를 따라 걷다가 '라임블루'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우도땅콩라떼(6,000원)를 시켰다. 월정리 바다를 시원하게 내다볼 수 있는 뷰는 좋았는데 딱 그정도까지였다. 우도땅콩라떼는 고소한 땅콩맛이 연하게 나긴 했는데 2% 아쉬운 맛이었다. 다음엔 이곳 말고 다른 곳을 가야지 생각하며 주머니 속에 든 이어팟을 찾았다. 근데 주머니에 있어야 할 이어팟이 없다. 아까 월정리 해안도로를 따라 걸어올 때 주머니에서 이어팟이 빠진 것 같았다. 땅콩라떼를 호로록 급하게 마시고 이어팟을 찾아 간 길을 돌아갔다. 근데 그거 하나 찾겠다고 진빼긴 싫어서 오늘 하루 액땜한 셈 치고 찾는 걸 포기했다ㅠㅠ
월정리 버스 정류장에서 701번 버스를 타고 환승역인 하도리동동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석다원까지 버스를 타고 가려고 했다. 근데 990번 버스가 올 기미가 없다. 제주도 버스시간표를 읽는 것도 어렵고 다음지도앱에서 배차정보도 뜨지 않는 상황에서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기엔 심심했다. 당시 나는 뭔지 모를 무모함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다음지도에서 석다원까지 도보로 걸리는 시간과 경로를 찾았다.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니 딱 점심 먹기 좋은 시간이었다. 별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올레21코스 부근이니 시작점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 하도리동동 버스정류장에서 세화 해녀박물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한 30분쯤 걸었던 것 같다. 근데 걷다보니 세화해수욕장까지 걸어갔다. 세화해수욕장은 아주 잠깐 걸었다. 파아란 바닷물이 아름답다는 세화해변인데 내가 본 건 잿빛 바다였다. 해녀박물관부터 한적한 해안도로를 걸었고 가끔씩 지나가는 마을구경도 하며 걸으니 심심할 틈이 없었다.
< 별방진 도착 >
세화에 위치한 해녀박물관을 지나서 해안도로를 따라서 걸었다. 하도리동동에서 해녀박물관까지 걸어올 때는 몰랐는데 해안도로는 정말이지 비바람이 엄청났다. 바람은 거셌고 비는 무지막지하게 쏟아졌다. 인심 좋은 분들이 이런 날씨에 걸어다니는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차에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걸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굳이 거절하면서 오기로 걸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별방진 도착.
별방진 위에서 목숨을 건 셀카도 찍었다.(셀카는 비루하니까 사진크기를 줄여서 올려야지ㅋㅋㅋㅋ)
원래는 서서 찍으려고 했는데 비바람이 워낙 강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지라 앉아서 찍었다. 지금 봐도 비에 맞은 생쥐꼴이 따로 없다. 참고로 우산은 쓰나마나 비를 맞아서 쓰지 않은 것 아니다. 바람이 워낙 세서 우산기둥과 살이 꺾여서 우산을 뚫고 나왔다. 작년에 종로 아트박스에서 9,000원을 들여샀는데 이리 비를 막아주는 소임도 다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다.
별방진에서 내려다보는 한-적-한 해안도로도 찍고 하도항 간판도 찍고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내기는 개뿔... 사진만 잠깐 찍고 금방 내려왔다. 별방진 위에서 내려올 때도 정말 조심하면서 내려왔다. 내 신조에 조심은 없는 사람인데 별방진에서 바람에 시달리면서 내 생명이 참으로 중허다는 걸 느꼈다.
< 석다원 성게해물칼국수 >
석다원에는 오후 1시쯤 도착했다. 비바람에 시달리고 와서 뜨끈한 국물이 간절하던 찰나였다. 성게해물칼국수를 시켰더니 금방 나왔다. 면발은 쫄깃하니 좋은데 국물이 너무 짰다ㅠㅠ 이럴 줄 알았으면 덜 짜게 해주세요라고 할 걸... 그래도 맛은 있어서 면과 해물은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근데 내 입맛에는 너무 짜... 식당밥에 익숙해진 아재들은 속이 풀린다며 좋아할 것 같은 맛인데 저염식에 길들여진 내겐 너무나 짰다...
< 석다원 바로 앞에 있던 돌들 >
석다원 바로 옆에 리치망고가 있었는데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먹어봐서 아는 맛이기도 했고 이런 날씨에 아이스음료를 마시면 저체온증에 걸릴 것 같았다. 내 몸은 내가 챙겨야지, 누가 챙겨준단 말인가.
제주도사람들에게 현무암돌담길 같은 일상적인 풍경도 육지사람에게는 사진으로 찍어야하는 특별한 풍경이 된다.
걷다 보니 예전에 한번 지나갔던 하도 어촌계 공동창고도 지나가게 되고. 그때는 둘이 왔었는데 이번엔 혼자 오게 됐다. 그때도 하도 어촌계 창고의 오래된 느낌이 좋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비 오는 날의 느낌도 남달랐다.
남은 거리가 5.5킬로미터임을 알려주는 제주 올레 안내판. 남은 거리를 보니 힘이 났다.
지나가는 사람도 자동차도 없는 아무도 없는 해안도로. 뭐, 무섭지 않았다. 미칠듯이 내리는 비와 우산을 고장내버린 엄청난 바람이 밉기는 했는데 그래도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쳐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비 오는 날 올레를 걷는다는 이상한 희열에 사로잡혀 있었다.
드디어 지미봉이 보인다. 어느덧 종달리라니 감격이 밀려왔다. 4월 27일 수요일 숙소는 종달리에 위치한 뚜르드제주였다. 뚜르드제주도 정말 급하게 예약했다. 운이 좋아서 당일예약을 할 수 있었다. 흐흐흐. 종달리에 가까이 온 것 같은데 이놈의 비바람은 그치질 않는다.
비바람이 강한 날 해안산책로를 따라걷는 건 정말 미친 짓이다. 당시엔 이런 상식조차 몰랐다. 진짜 간땡이가 부어도 이렇게 부을 수가 없다.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올레길은 이 주황색, 파랑색 간세 리본만 따라서 잘 걸어가면 된다. 이거 덕분에 올레길 걸어다니기가 어찌나 수월했던지.
걷고 또 걷고
바람이 불어도 좋단다, 으이구.
종달리의 상징, 지미봉이 정면에 보인다. 비가 내리지 않고 맑은 날씨였으면 정자에 앉아서 시원한 바다바람도 쐬면서 쉬다 갈텐데 현실은 사진만 찍고 가기 급급했다.
파도가 터-얼-썩, 터-얼-썩-
지미봉이 점점 더 가까워진다. 종착지가 가까워지니 흥이 절로 난다.
올레길을 걷는 와중에도 비에 젖은 분홍빛 철쭉을 구경하는 것도 놓칠 수가 없다. 차를 탔으면 지척에서 철쭉을 들여다보긴 했을까. 아마 철쭉이네 하고 슥 지나가고 말았겠지. 이 또한 걸으니까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풍경.
이곳은 종달리 불턱이다.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하는 공간이란다. 종달리불턱 사진을 정말 못 찍었지만. 이 불턱에서 묘한 감동을 느꼈다. 불턱이 비경은 아닐지라도 해녀들의 애환과 일상이 담긴 공간인만큼 그 가치를 가벼이 여겨선 안 될 것 같았다.
종달리불턱 바로 옆에 있던 고망난불턱.
파도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불턱에서 조금 걸어가니 나오는 해안산책로. 나는 이길이 정말로 좋았다. 올레 21코스는 올레 7코스, 10코스처럼 유명하지 않지만 하도-종달 해안산책로는 정말 멋졌다. 해안산책로를 따라 검은현무암 위에 자라난 이름모를 노란꽃은 경치의 아름다움을 더해줬다. 비가 오는 날에도 이렇게 좋은데, 파란 하늘이 보이는 날이 맑은 날에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이 좋은 길을 혼자 걷는 게 아까울 정도였다. 나중에 하도-종달 해안도로를 검색해보니 드라이브할 때 경치가 끝내주는 코스라고 한다. 하도-종달을 잇는 이 산책로를 날씨 좋은 날 와서 다시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사진으로는 그날 느꼈던 아름다움이 전해지지 않아 아쉽다. 그래도 내 두눈과 가슴에 그 모습을 오롯하게 담았으니 됐다.
해안산책로를 따라걷는 길도 막바지.
지미봉이 점점 가까워진다. 올레21코스를 정석대로 걷는다면 지미봉도 올랐다가 종발바당까지 걸어가야 했지만, 그건 내일로 미뤄도 괜찮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미봉 앞까지 갔다가 뚜르드제주에 체크인을 하기로 했다.
가을이 되면 정말 멋질 것 같던 종달리 철새도래지. 사진이 비루해서 그렇지, 드넓게 펼쳐진갈대밭이 바람에 일렁이는 광경은 내 마음도 흔들었다.
유채꽃이 만개한 시점이 지난 4월 말에 제주도를 왔기에 노란 유채꽃밭 풍경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를 아예 접고 있었다. 그런데 지미봉 앞에 이렇게 탐나는 유채꽃밭이 딱 있었다. 유채꽃밭 너머의 고요한 지미봉은 그 아름다움을 더해줬다.
혼자서 얼마나 오두방정을 떨면서 사진을 찍었는지. 사람들이 없는 유채꽃밭을 볼 수 있어서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기대도 안했던 유채꽃을 보는 것도 기뻤는데 이 광경을 혼자 독차지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감동에 젖어 한 15분은 머물렀던 것 같다.
축축해질대로 축축하게 젖은 등산화에 내발도 목욕탕에 다녀온마냥 팅팅 부었지만 그것마저 괜찮았다. 제주도의 유채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처음이었다. 4월 24일 일요일, 도선사 가는 길목에서 벚꽃도 보고 이제 제주에서 유채꽃도 봤으니 한국의 봄을 온전히 즐겼단 생각이 들었다.
이 풍경이 험난했던 오늘 하루에 대한 보상 같았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행복이 펼쳐졌다. 비바람을 맞아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는 머리칼과 자꾸만 날아가는 모자, 젖어서 축축해진 등산화로 인해 불쾌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드려는 찰나에 이런 풍경을 보니 그런 마음들이 사라졌다.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순간이었다. 사진에 담지 못했지만 운무가 넘어가는 지미봉도 장관이었다. 넋을 놓고 바라봤다. 옅은 비구름이 걸린 지미봉은 신성해 보였다. 원래 나는 꽃밭보다 숲이 더 좋은 사람인데 그날만큼은 꽃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올레 21코스, 하도-종달 올레를 걸었던 당시를 돌아보면 나는 뭔가 미쳐있었다. 올레길을 무작정 완주해야한다는 목표의식은 없었지만 걸어야 한다는 열망이 있었다. 그저 빗 속을 무작정 걷고 싶었다. 내 안의 잡념을 싸그리 비우고 싶었다. 나에 대해 생각하고 성찰할 시간이 필요했고 절실했다. 그래서 나는 걸어야만 했고 걸었다.
무모해 보일지라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걸어야 보이는 풍경을 내안에 담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나란 생각이 들 시점이 되면 어김없이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졌다. 우산이 고장나는 강한 비바람을 욕하면서도 그런 날씨에서 더 빛나는 광경을 발견할 수 있어 기뻤다. 풍랑이 거센 바다를 방관하는 즐거움도 있었고 해안도로에 드문드문 있는 식당, 카페, 게스트하우스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초록빛으로 물든 생기발랄한 제주의 산과 들판을 보며 비로소 봄을 느꼈다. 여기저기 피어난 이름모를 꽃들로부터 이유 모를 위안을 받으며 길을 걸을 용기를 얻었다. 고고한 지미봉과 여리디 여린 유채꽃의 조합도 감동적이었다. 철새도래지 근방 해안도로의 풍광도 일품이었고. 제주도는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풍경을 선사해줬다. 고마웠다.
걷다가 풍경 구경하면서 이게 놀멍쉬멍이지 싶었다. 실상 서바이벌에 가까웠던 21코스 올레 걷기였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를 충만하게 하는 값진 경험이었다.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수 있는 눈이 있음에 감사함을 느낀 하루. 종달바당과 지미봉은 내일을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4월 27일 수요일, 21코스 하도-종달 올레는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이제 종달리 마을 구경을 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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