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사방팔방을 돌아본 지인에게 한라산 등반 코스를 추천해달라고 하니 단번에 영실이 나왔다. 영실탐방로에서는 한라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짧고 임팩트있게 구경할 수 있단다. 다양하게 변하는 풍경 때문에 보는 재미가 쏠쏠할 거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아침 8시 정도에 영실휴게소를 향해 출발했다. 숙소인 빠레브에서 영실휴게소 주차장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영실휴게소 주차장까지 가는 도로는 경차에게는 버거운 엄청난 오르막이었다. 영실휴게소 주차장은 거의 다 차있었지만 운 좋게 주차할 수 있었다. 영실휴게소에 여유롭게 차를 대려면 아침 8시 전에는 대야할 듯.

광주 무등산 정상인 천왕봉 해발이 1187미터다. 영실코스의 출발지인 휴게소의 해발은 1280미터다. 영실코스의 출발점이 무등산 정상보다 해발이 높은 걸 보면 역시 한라산의 클래스는 남다르다.

영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게 있다. 엄청나게 많은 계단을 쉴새 없이 올라가야 한다는 거다. 구상나무 숲이 나오기 전까지 꼬박 1시간 동안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길을 질색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최악의 코스다. 다행인 건 그 1시간만 참으면 그이후로 힘든 코스는 없다는 거다.

영실 병풍바위의 모습이다. 사진으로는 병풍바위의 스케일이 제대로 와닿지 않는다. 실물이 훨씬 더 멋있다. 가을 단풍이 한창일 무렵 오면 눈이 호강하겠다 싶었다.

영실을 오르면서 감사했던 건 오르막과 내리막이 무한반복되는 지리산 같은 등산로가 아니었다는 거였다. 일관성 있게 오르막이니 많이 힘들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계단길은 고행길이었다.

영실을 오르는 내내 불어오는 바람과 맞써 싸웠다. 기암괴석을 넘어가는 수많은 구름만큼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막이가 없었더라면 저체온증에 걸렸을 듯.

계단길을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니 바다가 똻! 바다가 보이니 신기했다.

발밑으로 펼쳐진 구름들. 양털처럼 따뜻하고 폭신폭신해 보였다. 정작 구름은 만져지지도 않을 뿐더러 추위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구름이 머리 위로 지나갈 때 바람막이 후드를 푹 뒤집어 썼다.

기암괴석이 보이는 등산로를 지나가면 구상나무 숲이 펼쳐진다. 구상나무 숲을 지날 당시에 엄청난 구름과 안개가 밀려오는 바람에 사진을 찍을 엄두를 못냈다. 구상나무 숲 사진을 못 찍고 온 게 아쉽다.

구상나무 숲을 지나면 나오는 곳은 선적지왓이다. 넓게 펼쳐진 조릿대 들판이 신기했다. 선적지왓은 고산식물 자생지로 유명하다는데 아는 고산식물이 없어서 너른 들판에 감탄하면서 이곳을 걸었다.

오르막길을 계속 오르다 평탄한 길이 펼쳐지니 살 것 같았다. 나무데크가 잘 깔린 등산로를 걸으면서 이 길을 조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했을까.

구름에 뒤덮인 한라산 정상의 모습. 왜 옛날 사람들이 한라산에 신선이 산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갔다.

정처없이 영실을 넘나드는 구름을 보면 영실은 역동적인 공간이다.


이곳을 오르면서 영실에 가길 잘했다고 수백 번 생각했다. 여길 오니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선생님께서 "영실! 한라산 영실을 안 본 사람은 제주도를 안 본 거나 마찬가지야"라고 했던 대목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영실에서 보이는 백록담 봉우리의 모습. 구름이 봉우리를 둘러싼 자태가 사뭇 상서롭다. 영실에서 백록담을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다는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윗세오름 전망대를 올라가는 M군. 영실코스를 차근차근 둘러보며 오르다 보니 여기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선적지왓, 윗세오름 전망대 산 좀 탄다는 분들은 보다 1시간이면 이곳까지 주파가능할 듯.

윗세오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풍경. 고산식물로 추정되는 다양한 식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해발고도가 높다보니 이곳의 식물들은 높이 자라질 못한다. 눈내린 영실의 겨울도 분명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한국에서 볼 수 없을 것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어 감개무량했다. 구름과 더불어 걷는다는 게 얼마나 환상적인 경험인지. 이곳이야말로 한국의 순례자의 길 아닐까.

윗세오름 대피소를 들렀지만 수중에 현금이 없어서 라면을 사먹질 못했다. 카드결제만 되었어도 든든하게 라면을 먹었을 터인데... 대신 챙겨온 밤만쥬와 닥터유를 야무지게 먹었다. 그거라도 있어서 다행이었지, 당 보충을 아예 못하는 것보단 나았다.

영실을 오르는 등산객 중에는 중국인도 제법 있었다. 성산일출봉만큼 바글바글 하진 않았지만. 암튼 바쁜 일정 중에도 영실처럼 나름 빡센 코스를 소화해내는 그들의 체력에 감탄했다. 신발도 컨버스나 플랫 같은 걸 대충 신고 올라가는데 역시 등산도 장비보다는 기본 체력이 좋아야 하는 것 같다.

보다 가까이에서 찍은 백록담 봉우리의 모습. 사진으로는 그 장엄한 아우라를 담는 건 불가능했다. 구름이 백록담 봉우리를 넘어가는 모습은 사진이 아니라 정말 실제로 봐야 한다.
백롬담 봉우리를 넘어가는 구름의 모습인데 이 역동적인 모습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M군은 이 모습을 무려 1분짜리 동영상으로 찍었다.


남벽분기점으로 내려가는 길목이다. 이쪽으로 쭉 내려가면 돈내코 탐방로로 이어진다. 우리는 영실탐방로 휴게소 주차를 했으니 이쪽으로 가지 않는다. 사실 남벽분기점 찍기 귀찮았다. 남벽분기점을 가려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니까.

내년을 기약하면서도 아쉬움이 남아 자꾸만 뒤돌아봤다. 영실의 풍경을 원없이 머리와 가슴에 담았으면서도 뭐가 이렇게 아쉬웠는지.

백록담 봉우리만 수십 장 찍은 거 같다. 나도 M군처럼 1분짜리 동영상 찍을 걸.

영실을 오르다 보니 아둥바둥 살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했고 자연에 비하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런 풍경을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산악회 활동을 했던 회사언니가 말하길 한라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1년에 4번을 간단다. 한라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러 가기 위해서라는데 영실을 한 번 가보니 그맘을 알 것 같다.

영실을 오른 게 10월 초, 가을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하던 차였다. 뭐 산 중턱에 울긋불긋한 나무들을 보면 나름 가을 느낌이 난다.


이날만큼은 구름을 보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 볼 필요는 없었다. 구름이 내옆에 때로는 내 발 밑으로 펼쳐졌다. 영남 알프스를 가면 구름이 발밑에 있다는데 내년 가을 영남 알프스 억새축제를 꼭 가고 말꺼야.

날씨가 워낙 좋으니 막 찍어도 괜찮아 보인다. 영실을 오르기 전, 날씨가 변덕스럽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는데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날씨 짱짱데스요. 우리가 여행한 5박6일동안 비가 쏟아지거나 태풍이 불어오는 불상사가 없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선적지왓 일대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푸른 초원에 솟아난 현무암이 귀엽게까지 느껴지는 걸 보면 영실에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나 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라는 노래가 절로 생각나는 선적지왓.

우리는 한라산 산행에 앞서 캠프라인 블랙스톰을 샀다. 종로5가 로*캠프에서 현찰 박치기로 인터넷 최저가보다 싸게 살 수 있었다. 암튼 확실히 등산화가 산행에는 편하다. 미끄러지지 않아서 안전하기도 하고 확실히 발이 덜 지친다. 예전에 런닝화 신고 어떻게 북한산을 오르내렸는지 ㅋㅋㅋㅋㅋㅋㅋ

영실을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힘들었다. 역시 대피소 매점에서 라면을 못 사먹은 타격이 컸다. HP는 아직 많이 남아있는데 SP가 딸리는 느낌이랄까.
허기가 지니 기력이 솟질 않았다. 뭐 점심 먹을 생각을 하니 기운이 샘솟기는 했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점심을 먹으러 갔다. 둘다 순대국이 먹고 싶었는데 맘에 드는 순대국집이 마침 문을 닫았다. 그래서 그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새끼보순대국을 하는 곳을 들어갔다. 순대는 평타 이상. 쫄깃한 식감이 짭쪼름한 간이 맘에 들었다.

그런데 새끼보순대국은... M군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악이란다. 새끼보가 이렇게 비릴 줄 몰랐었다면서. M군의 기준에서 이번 제주도 여행 중 유일하게 실패한 밥집이었단다.

근데 별 불만 없이 잘 먹었던 나는 뭐가 되는 건가... 썩 맛있지는 않아도 아주 못 먹을 맛은 아니었다. 물론 재방문 의사는 전혀 없는 식당이지만.
암튼 배를 적당히 불르고 등산을 해서 적당히 피곤하겠다. 숙소로 들어갈까 했는데 그러기는 둘다 아쉬워서 외돌개를 가기로 했다.